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할머니에 대한 추억

할머니에 대한 추억

나는 할아버지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저 제사상 위에 놓인 할아버지 초상을 보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떤 분이라고 설명을 들었던 기억도 없다. 그러니 그에 대한 추억도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어떤 때는 할아버지와 같이 노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적은 있었다.

 

할머니는 남매를 두셨다. 오빠인 아버지와 동생인 고모님이 계셨다. 그리고 할머니 형제분들은 몇 분이 계셨는지 잘 모른다. 오빠가 있었는지 동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집에 오시는 김제에 사시는 큰 이모할머니 한 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곤 가까운 친척으로 만경에 사시는 두 분정도 외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고 설명해 주지도 않으셨다. 그만큼 할머니도 우리 아버님만큼이나 집에서는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조용한 분이셨다.

 

할머니는 아들하고 같이 지내셨다. 외아들인 아버님으로부터 첫 손자가 태어난 날은 무척이나 기쁘셨을 것 같다.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데리고 다니셨다. 어릴 때 기억이 할머니를 따라 여기저기 다녔던 기억이 있다. 국수 공장을 운영하던 김제 큰 이모할머니 댁에도 갔었고, 어딘지 모르지만 철길을 걸었던 기억도 있다. 그런 첫 손자가 바로 나다. 아마 손자가 귀여워서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유추해본다. 내가 지금 그 위치에 있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항상 말씀을 잘 하지 않으셨고 그저 자기 일만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도 손자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아버님은 당시 제일은행에서 근무하셨는데 지방으로 여기저기 전근을 다니실 때는 막내만 데리고 가셨다. 나머지 손자들을 보살피고 키우는 일은 할머니 담당이었다. 전주에 근거지를 마련해놓고 지방을 다니실 때는 우리는 할머니하고 지냈다. 정읍, 김제, 군산, 이리, 전주 등에서 근무하셨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다 맡기시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오셨다. 할머니는 그런 우리 형제들을 올곧게 클 수 있도록 잘 거두어 주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런 고마운 할머니에게 이유 없는 투정을 부린 기억이 생각난다. 할머니 회갑 날 이었고,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요사이는 보통 음식점을 빌려서 회갑잔치를 하지만 그때는 집에서 행사를 치렀다. 일가친척들을 초대해서 성대하게 잔치를 치렀었다. 그런데 그날 이 철없는 큰손자는 괜한 심술을 부렸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면서 기념사진 촬영 때도 가지 않았다. 사진을 보면 나만 없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른다. 할머니는 아마 말씀은 안 했지만 무척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이다.

 

평소에 말씀이 적으셨던 아버님은 그런 할머니에게 살갑게 하셨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지 몰라도 할머니는 군산에 있는 고모님 댁에 자주 가셨다. 어떤 때는 나도 데리고 가셨다. 무뚜뚝한 사내들만 있는 곳보다는 정겨운 딸이 있는 그곳이 편안하셨나 보다. 고모님은 딸만 넷이고 우리 집은 아들만 다섯이었다. 그 덕에 군산에 있는 사촌들과 각별히 지낼 수 있었다. 가끔 할머니는 보러 군산에서 사촌들이 놀러 오기도 했었다. 그때는 할머니는 외손녀들하고 참 정겹게 지내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머님에게는 그 모습이 별로 이셨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군산 사촌들은 할머니 산소를 찾기도 하고 만나면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곤 한다. 할머니는 82세를 일기로 편안하게 집에서 돌아가셨다. 다른 사람들처럼 병원에서 임종하신 것이 아니라 집에서 앓지도 않으시고 편안하게 가셨다. 그리곤 할아버지 옆에 편안히 누우셨다.

 

내가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할머니 부고를 들었다. 전날 저녁 식사도 잘 하시고 다음 날 새벽에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어머님이 발견하셨다고 한다. 자손들에게 고생도 시키지 않고 편안하게 살다 가셨다. 할머니 장례는 집에서 치렀다. 입관 전에 편안한 할머니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내 생각에는 좀 더 살아계셨으면 했다. 할머니는 증손자를 업고 달래면서 즐거워하셨다. 첫 손자가 장가를 가서 손자를 보게 되었으니 기쁘셨을 것이다. 손주 며느리가 출산을 하고 몸조리할 때 전주에서 멀리 인천까지 오셔서 집안일을 돌보아 주시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얼마나 기쁘셨으면 먼 길을 오셨을까 하는 마음을 헤아려 본다.

 

이제야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우리들을 위해 헌신하셨는데 그때는 왜 그 마음을 몰랐을까? 내가 그 나이가 되고 손주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손주를 보는 마음하고 자식을 보는 마음은 그 차원이 다르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면서 할머니가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때 좀 더 다정스럽게 다가가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그리움이 겹친다. 정말로 있을 때 잘해야 한다.

, 할머니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