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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첫 경험

내가 치른 입시(사) 시험

▶ 내가 치른 입시(사) 시험

 저는 정읍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다니다가 아버님의 직장이 전주로 전보되는 관계로 3학년 때부터는 전주에서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사회생활하면서 입학시험을 본 것은 딱 두 번입니다.

 

 첫 번째는 중학교 입학시험이었습니다. 지금은 무시험으로 거의 다 중학교에 진학하지만, 그때에는 중학교 입학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은 일류 중학교 합격자를 많이 내기 위해서 야간수업도 하였습니다. 합격자 수에 따라 소위 명문 학교로 이름을 날릴 수 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고 선생님들 간에도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시골도 아닌 전주 시내였지만 그 당시에는 전등 설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촛불을 켜놓고 야간수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입니다.

 

 한 번은 촛불을 켜고 수업을 하다가 종이를 말아서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우듯 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마침 학교에 저를 마중 나와 잠시 교실에 들르신 어머님에게 들켜 혼이 났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필이면 그때 그 모습을 보시게 되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다른 때는 학교에 오신 적이 없었거든요.

 

 전주에서 일류학교로 인정하는 중학교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성적은 반에서 상의 상에 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학시험을 보고 나서도 별다르게 걱정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입시 전 날에, 그 당시 집에 목욕탕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님께서 방 안에서 함지박에 더운물을 데워 오셔서 목욕을 시켜 준 기억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중학교 때도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았는지 방과 후에 별도로 남아서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린 기억도 있고,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시험 예상 문제를 칠판에 적어서 반 친구들에게 설명을 하기도 할 정도로 성적은 상위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는 동일계 무시험 진학이라는 혜택을 받아 시험 없이 그냥 진학했습니다. 아마 전주에서 유일하게 무시험으로 진학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정희 대통령 그 당시에, 아마 대통령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여서 정부에서 특혜를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 아들이 다니는 학교만 무시험 진학이라는 특혜를 주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동일계 무시험 진학이라는 명목으로 저희에게도 어부지리로 특혜가 주어진 것으로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좌우지간 우리는 중3 때 입시에 대한 부담을 갖지도 않고 전원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아마도 다른 중학교에서

저희 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학생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조치였을 것입니다.

지금에 이런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는 발상 자체를 할 수도 없고 절대 용납이 되지 않겠지만 그 당시는 그랬습니다.

저희 때만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해에는 없어졌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수능이라고 해서 그 점수가 대학 입시에 반영되지만, 그 당시는 예비고사에 응시하여 일정한 점수 이상을 취득해야 대학 입시에 지원할 자격을 주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이 통과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불합격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입시는 서울대에 원서를 내기에는 좀 불안한 성적이었습니다. 안전하게 하자고 하면서 연대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합격할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합격자 명단이 개재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당장 재수를 해야 되나 하는 아찔한 생각만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재수는 하기 싫었습니다. 후기 입시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양대학교에 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입학시험을 봤지만 이번에도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다만 예비자 명단에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무룩하여 별수 없이 재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입시 전문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종로에 있는 대성학원, 정일학원 등이 유명한 재수 종합학원이었습니다. 그 학원에 다니기 위해서는 시험을 봐서 일정한 실력 이상이 있어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일단 그 학원에 다니면 많은 사람들이 SKY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합격자 등록 마감일이 지나도록

등록을 하지 않은 인원이 있어 예비 합격자인 저에게 입학등록을 하라는 통지가 왔습니다.

한 시름 놓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회사 취직할 때도 저희 때는 시험이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면접만 봤습니다. 그 당시 1970년대는 한참 경기가 수직 상승하던 시기라 각 기업체에서 인재를 뽑기 위해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우리 몸값이 좀 나갔던 호시절이었습니다.

학교로 각 대기업 인사담당자가 찾아와서 설명회를 실시하고 서로 자기 회사로 끌어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처럼 취업을 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지원서를 제출해 놓고 골라 서 취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졸업도 하기 전 4학년 2학기 말에는 벌써 직장이 결정되어 각 기업체에서 연수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참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 젊은이들이 학교 졸업 후 취업할 직장 때문에 방황하는 시절이 빨리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항상 패기 있게 일할 젊은이들이 낙담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한 중지를 모아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는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의 각성이 누구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뿐일까요? 공존공생!

 

나는 지금 새로운 경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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