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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도 되는 첫 경험

죽음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

맞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최고의 권력자도 재력가도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어느 정도 생명이 연장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이 지구는 벌써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옛날 중국의 진시황이라는 권력자는 있지도 않는 불로초를 찾아 헤매었는지도 모릅니다.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제가 맞이한 죽음은 할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82세까지 사셨습니다. 그 전날까지 저녁 식사도 잘 하시고 다음날 새벽에 화장실에서 쓰러지신 후 그냥 운명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작스런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님의 직장 때문에 한동안 떨어져 살아야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할머니께서는 어머님을 대신하여 우리 형제들의 일상을 아무런 말없이 챙겨주셨었습니다.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도 하기 전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는 지금처럼 장례식장을 이용하지 않고, 우리들이 살던 집에서 치렀습니다. 독자이신 아버님 혼자 상주 노릇을 하셨지요. 입관을 하기 전에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계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만경에 있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옆에 모셨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죽음에 대한 실감을 깊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장손의 입장에서 할머니의 영정을 모시고 갔던 기억만 생생합니다.

 

부모님들은 어머님이 2017년도에 89세로, 아버님은 1년 후인 2018년도에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같은 요양병원에 5년 가까이 계시다가 1년 터울로 가셨습니다. 형제들이 많아 쓸쓸하지 않게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장례를 마쳤습니다. 멀리서 일가 친척분들도 오셔서 가시는 길을 허전하지 않게 잘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분을 같은 추모관에 나란히 모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장례를 마친 후 슬픔이 엄습해왔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보고 싶은 마음에 목 놓아 울었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그냥 울음이 나왔습니다. 두 분이 안 계신다는 현실을 직시하니 더욱더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도 불현듯 보고 싶은 마음이 일지만, 장례를 마친 후에는 한 동안 더욱 그런 모습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두 분이 안 계신 자리가 무척이나 허전했고 공허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생존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허전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렇게 가족 중에 세 번의 죽음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태어난 순서대로 하면 제가 다음 차례입니다. 만약 저를 추월해서 먼저 가는 사람을 보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가고 난 다음에 차례대로 삶을 즐기다가 왔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저에게는 축복일 겁니다. 다시는 가족 중에서 죽음을 만나기 싫습니다. 그리 되기를 빌어봅니다.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나니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웰빙도 좋지만 웰다잉에 대한 생각이 많아집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웰다잉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종종 합니다. 부모님들의 죽음을 만나고 나서, 고등학교 동창들이 하나 둘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납니다. 하루가 다르게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 상태를 의식하면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게 됩니다.

 

’9988234 운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자는 얘기지요. 복 받은 인생입니다. 수명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늘어난 수명만큼 걸림돌만 되었다가 가는 삶은 정말로 피하고 싶은 삶입니다.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자식들과 손주들의 환송을 받으며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입니다. 다음 순번으로 번호표를 받은 입장에서 소망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왕이면 손주들이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으면 안아보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마르셀 에메라는 프랑스 작가는 그의 생존시간 카드라는 단편 소설에서 ’일시적 죽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할 일이 없어지면 한 달 중에서 몇 일간은 죽었다가, 월 초에 다시 생환해서 살도록 하자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소설의 내용처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을 더 소중히 살 수 있을까요? 소설에는 그전보다 더 알뜰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갈 때 가더라도 평소에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관리를 잘해서 즐겁게 지내다가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괜히 병원에 누웠다가 자식들에게 짐이 되어 걸림돌로 있다가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새벽부터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하고 소식과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내 마음자세부터 다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새로운 경험에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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