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날 때마다

‘나’를 부르는 이름

를 부르는 이름

각자의 주민등록에 등재되어 있는 이름이 본명입니다. 내 이름은 이 현동입니다. 본명입니다. 한자로는 솥귀 ()’에 동녘 ()’을 씁니다. 무슨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작명가에게 부탁해서 호적의 동(東)자 돌림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 이름은 자 돌림인데 막내만 다릅니다.

 

를 부르는 이름으로는 본명 외에 태어나기도 전에 부르던 태명이 있고, 어릴 적 친구들이 불렀던 별명이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집안에서 부르는 이름이 별도로 있는 사람이 있고, 고등학교 때에는 초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부르던 별명이 또 있지요. 또한 회사라는 조직에 있을 때 사회에서 부르던 이름이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단체에서 부르는 별칭예명도 있습니다. 그리고 좀 나이 들어서는 아호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생을 살아가면서 한 사람에게 불리어지는 호칭이 참 많이도 있네요.

 

부모님들은 자녀를 잉태하면 태명을 짓기도 하는데, 저의 태명은 안 지었는지 내가 모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는 잘 모릅니다. 부모님에게 여쭤보지도 않았습니다. 태명이 무언지, 이름의 뜻이 무언지 여쭤보지도 않았습니다. 옥편을 찾아보니, ‘솥귀 현이라는 의미에 재상(宰相), 삼공(三公)의 지위라는 뜻이 있는 것을 보면, 재상의 지위에 오르라고 지은 이름 같습니다. 지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름대로 인생이 살아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강의 시나 처음 만나는 모임에 가면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를 소개할 때 아현동을 들먹입니다. 아현동은 서울 마포구에 있는 동네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요. 그 동네이름에서 점 하나를 빼면 제 이름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그러면 많이 기억들 해주시더라고요. 실제로 제 이름과 같은 동네가 전국에는 10여 곳 넘게 있습니다. 용현동, 인현동, 충현동, 송현동, 탁현동 등이 있고요. 대구시 이현동, 진주시 이현동. 충청도에 이현동 마을 및 경북의 현동 시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저의 별명은 좀 밝히기 거시기 하지만, ‘똥싼배기였습니다. 2학년 때 교실에서 바지에 실수를 했거든요. 정읍에서 전주로 전학하기 전까지 무척이나 듣기 싫었던 별명이었습니다. 전학 와서는 무슨 이유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꼰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습니다. 5학년 한 학년 동안 불리어졌던 별명이었는데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6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야구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번개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제가 축구를 좋아했었는데 조그만 녀석이 재빠르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고 붙여진 별명입니다. 초등학교 때 별명보다는 한결 듣기 좋은 별명입니다. 그 후로는 별다르게 기억나는 별명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마 그리 특출하게 생활하지 않아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일이 없어서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한참 세월이 지나 하비람이라는 수련단체에 참여했을 때, 내가 스스로 지었던 별칭이 있습니다.

 

그 당시 수련을 안내하던 선생님의 별칭이 아침햇살이었습니다. 각자 별칭을 하나씩 지으라고 하는데 별다르게 생각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선생님의 별칭과 대칭되는 것이 생각나서 그냥 저녁노을이라고 지었습니다. 내 별칭을 들으면 남들은 저물어가는 느낌이 든다고 하지만, 지어 놓고 그럴듯하게 뜻을 풀이해봤습니다. ‘저녁노을처럼 황홀하게 삶을 살아가자는 의미를 주니 그런대로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또 다른 수련모임인 뫔 수련원에서 주어진 별칭은 요한이었습니다. 이때는 안내하는 선생님이 선정해 놓은 별칭 중에 무작위로 저에게 주어진 별칭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한 중에 어떤 요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좋은 이미지의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같이 수련한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사람 이름으로 별칭이 정해진 경우였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별칭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이 별칭은 그 단체에 있을 때만 통용되는 이름입니다. 두 별칭 다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별칭을 들을 때면 수련할 때의 느낌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이 새로워지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주위 친구나 지인분이 각자에게 맞는 를 지어주기도 하고 스스로 자기 호를 짓기도 하지요.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열 개가 넘는 호를 가진 분들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호는 청윤(靑侖)입니다. 지금부터 15, 6년 전에 약초공부를 할 때 한자에 조예가 있는 자칭 도인이라는 분이 지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자칭 도인이라는 사람과의 관계가 허물어짐에 거의 사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도 호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호의 뜻을 음미해보니 마음에 들었습니다.

 

푸를 ’, 둥글 또는 생각할 이라는 뜻입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항상 푸르게 살아간다.’는 뜻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사용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항상 젊게 살면서 삶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 참 좋았습니다. 지금도 제 얼굴을 보고 동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그 당시에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었더라도 좀 철이 없는 것처럼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요.ㅎ 가끔 호를 불러주면 어색하기도 할 때도 있지만 그 뜻을 되새겨 보면 조금 젊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김춘수 시인의 에 나오는 내가 그 이름으로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는 말처럼 말이지요.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흔히 예명을 사용합니다. 아름답고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은 이름으로 예명을 정하고 활동하고 있지요. 연예인들의 이름은 본명보다 예명으로 기억합니다. 혹시 누가 본명을 불러주면 생소하게 느끼 지지 않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여자분들 중에는 연예인도 아니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본명 대신 이쁜 예명으로 친구들 간에 소통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몇 년 전에 TV에서 야인시대라는 시대극을 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먹들이 등장하는데, 거의 다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별칭들을 사용하고 있더군요. 연예인들과는 달리 누가 더 날카롭고 사나운 별칭을 사용하는지 경쟁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의 본인들이 잘하는 특정 행동을 각인시킬 수 있는 별칭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본명을 표시하기를 터부시하는 집단이니 보니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들 일 겁니다..

예전에는 본명도 없이 집에서 편하게 부르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돌쇠, 개똥이, 언년이 등으로 말입니다. 돌쇠라는 이름을 호적에 한자로 표기해야 하는데 마땅한 글자가 없어서 그냥 돌 석’ 자에 ‘ㄹ’ 받침을 넣고, ‘쇠 금’ 자에 ‘를 붙여 돌쇠라는 한자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한자입니다. 또한 예전에는 선호하는 이름들이 있어서 동명이인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한자 이름이 아닌 순수한 한글 이름으로 독특하게 짓기도 합니다.

 

또한 예전에 이름이 좋아야 장수한다고 하면서 어떤 코미디 프로에서 무지하게 긴 이름에 대한 애환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려면 한참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급 상황에 그 긴 이름 때문에 시간이 소요되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오히려 생명이 단축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장수 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동방 갑자~~’ 뭐 이렇게 시작했지요? 장수하는 것들을 다 모아서 이름을 지었는데 그 긴 이름을 끝까지 다 말하려면 장시간이 소요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참 많이 따라 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코미디 일뿐입니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이름이 지어진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이상한 것이 상상되기도 하면서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개명을 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예전에는 상당히 복잡했었고, 개명 신청을 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자신의 이름이 그리 나쁘지 않아도 본인이 싫어하던지, 사주에 액운이 끼었다고 하면 개명 신청을 해서 수월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행정 전산화의 결과이겠지요?

 

본명이든 별명이든 자기를 부르는 이름이 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은 자존심을 상하는 일입니다. 자기 이름 석자(또는 두자)가 부끄럽지 않게 삶을 살고 싶은 욕구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좋은 이미지로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매국노로 패륜아로 악인의 대명사로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애처로운 마음이 듭니다. 유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두고두고 그 일의 대명사로 거론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삶을 만들어 가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성인이나 군자의 대명사로 거론되지는 않더라도 만인의 지탄을 받는 이름으로 기억되어 후손들에게 괜히 해를 끼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이름만 잘 지었다고 역사에 남는 것은 아닐 것이니 어떤 이름에 희희낙락하지 말고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이 좋건 나쁘건 자기의 본질 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각자의 이름들은 단지 자기를 호칭하는 것 일뿐입니다. 자기 이름을 세상에 떨치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실체를 도외시하는 행동이나 말은 삼가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 즉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청윤이라는 내 호를 들으면 기분이 젊어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동 준비  (0) 2020.12.10
김장  (0) 2020.12.09
어제에 이어서  (2) 2020.11.30
동네 작은 공원 새벽 산책길에서  (0) 2020.11.29
‘공정함’에 대한 생각  (0) 2020.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