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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활동에 관한 경험/본깨적

소크라테스가 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가?

소크라테스가 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가?

2천여 년 동안 서양철학을 지배해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을 창시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소크라테스(Socrates)입니다.

그는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인 기원전 469년에 석수장이 아버지와 산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아테네 사람이었습니다.

 

꺼끌꺼끌한 피부에 개구리 눈알처럼 툭 튀어나온 눈, 두꺼운 입술에 납작하게 주저앉은 코, 게다가 올챙이처럼 불룩 나온 똥배의 외모를 가진 그가 어떻게 매력 만점의 인기 맨이 되었을까요? 그의 주변은 늘 지체 높은 집안의 미소년들로 가득했고, 최고의 유명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그의 생활은 생전에 연극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하는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어떠한 매력으로 인하여 석수장이의 못생긴 백수 아들이 이처럼 유명세를 타게 되었을까요?

 

그의 말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신탁에 버금갈 만한 지혜로운 현자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추방당한 어떤 젊은이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여자로 변장하여 밀입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가르쳤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 물음을 통하여 스스로 답변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독선과 무지를 깨닫게 하여 주는 ‘깨달음을‘ 낳게 하는 산파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편견과 독선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과연 올바른지 고민하고 다른 이들과 이성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더 나은 삶을 지향하도록했습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학생중심의 발견학습내담자 중심의 상담을 통해 사람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겸손하라는,, 그리고 진리에 순응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제 잘난 생각에 독단의 잠에 빠져 타락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무지를 깨우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시장을 쏘다니며 끊임없이 묻고 다니는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자들한테 위험인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소위 말하자면 블랙리스트에 올라온 인물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늘 깨어있는 국민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은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올바른 사회인지를 스스로 묻도록 다그치고 다니는 그를 독재자들 입장에서는 여간 위험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권력자들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했고, 위협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이상한 논리를 펴면서 시장통에서 젊은이들을 몰고 다니며 타락시키고, 양심을 따른다며 국가가 믿는 신을 거부한다.’는 그럴듯한 죄명을 붙여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그를 굳이 죽여서 시끄럽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그가 겁을 먹고 입을 다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었지요.

 

그런데 그는 겁을 먹지도 입을 다물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기의 소신을 말하면서 재판관들에게 훈시하는 듯한 변명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정의로움의 의미, 죽음과 인간다운 삶에 대해 가르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동정 어린 표정으로 선처를 호소하는 피고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피고를 좋아할 배심원들은 아마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실패한 변명이며 그는 이 변명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짐작건대 재판은 감정이 실린 선동이 논리보다 더 설득력 있게 통하는 선거 유세전 같은 분위기를 띠었을 듯싶습니다.

 

대중이 모여 있을 때는 군중심리가 작동하기에 명석한 논리와 정당한 명분보다 선동이나 감정적인 말들이 설득력을 얻기 쉽습니다. 특히 특별한 법률적인 지식도 없이 추첨으로 뽑힌 501명의 재판관들은 어리석은 자들의 결정으로 흐르기 쉬웠습니다. 민주주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 국민의 뜻은 올바르며 다수의 의견은 정의롭다.’는 믿음은 이 신념이 항상 옳지는 않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문제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선택이 항상 정의이고 최선의 방안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다수의 선택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민주적인 토론과 결정은 관료들의 책임 회피 수단으로 이용되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모두의 결정보다는 전문가 한 사람의 선택과 결단이 더 나은 경우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란 어린아이들에게 쓴 약을 먹을 것인지 사탕을 먹을 것인지를 투표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기를 심판한답시고 떼거지로 앉아 있는 군중들이 당연히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가소롭게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이미지 관리가 정의와 진리보다 더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인자임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재판장의 분위기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그는 변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현명해 보이고, 더욱이 자기 스스로도 현명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나는 이 사람보다 현명하다. 우리 인간들 중 누구도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좋은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알지 못하기에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런 조그만 차이 때문에 나는 그보다 현명해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오해가 생겨난 것은 지혜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아주 단순하기 그지없습니다. “잘난 것들은 사실은 아주 무식한데도 뭔가 안다고 확신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가르치려 들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하지도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무지(無知)의 지()’가 소크라테스의 지혜이며 그것을 알고 있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까닭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얼마나 잘났고 유식한지 보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부분 지식이고 오류 지식인 지도 모른 채 자신이 최고인양 으스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 중에는 도덕적 판단력도 없이 규칙과 제도와 관행만 존중하는 멍청한 전문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말만 일삼는 무늬만 전문가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 분야밖에 모르는 전문적으로 문외한 답답한 전문가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림이라고 착각하는 재수 없는 전문가 집단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뭘 모르고 있는지를 모르는 밥맛없는 전문가들입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정진하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란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는 보통사람으로 눈으로 볼 때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기만 합니다. 높은 명성을 누린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고 해서 곧 존경할 만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현명한 사람이란 먼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이 고개를 숙이는 법, ‘모르는 것을 안다.’는 의미는 먼저 사람이 돼라.’는.’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한계와 처지를 알고 겸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아도 한결같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과 무식을 지적하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무식이 탄로 날까 두려운 유명 인사들이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고 당연히 제거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실을 뒤돌아보아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현실인 것입니다. 자기들의 권력을 영원토록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있을 소크라테스가 재판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혜로운 현자가 그러한 명백한 사실조차 좌시했다는 것은 그만의 아집이고 융통성 없는 처신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진리의 실천에 대한 의지때문에 그는 올바름 앞에서라면 목숨도 던져 버리는 진리의 순교자로 남을 수 있었으며,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 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진정한 삶의 태도로 존중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정의롭지 못한 선택으로 법정에서 살아남았다면 그는 이미 2,500년 전에 죽은 사람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죽음이 삶보다 좋은 것이라고 선뜻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처럼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인간이 참된 인간이라고, 삶의 욕구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그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어 집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육체를 뛰어넘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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